이 본문의 내용은 이일하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님의 저서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애들레이드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맺은 좋은 인연으로 흔쾌히 연재를 허락해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자의 말]
여러 해 동안 나는 다양한 곳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을 요청받아 진행해왔다. 강연의 초창기, 한 시간짜리 강연이지만 그 안에 ‘생명’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을 담았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청중들에게 생명을 개념적으로 모두 이해하게 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어찌 보면, 무려 30여 년 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내 정신세계에 스며들었던 생물학적 개념을 고작 한 시간에 다 이해시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생명(생물학)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써보면 어떨까, 각자의 속도에 맞춰 읽고 이해하며 한 걸음씩 배워갈 수 있는 제대로 된 생물학 커리큘럼을 담은 책이라면, 생명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생물학적 개념의 핵심을 오롯이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지질학자 한 분과 식사하며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기독교신자이기도 한 그분은 지질학 분야에서 꽤 인지도가 있고 학식도 깊었다. 식물분자생물학을 연구하고 있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그분은 “식물의 종자는 참 놀라워요. 죽었던 것이 어떻게 따뜻한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우고 살아나는지……” 하고 말했다. 지질학자의 입장에서는 식물의 발아과정이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는, 일종의 ‘부활’이라 부를 수 있는 경이로운 일로 보인 것이다. 하긴 수천 년 된 종자가 발아했다는 기사도 나오는 판이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다. ‘일반인들은 이런 생물학적 오해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그때의 생각은 내게 생명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소개하는 책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가히 21세기는 생물학의 세기라는 구호에 걸맞게 각종 신문기사나 사설, 매스컴 등에 생물학 관련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에 깔린 생물학적 지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뉴스를 접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아마 이 때문에 뉴스는 항상 ‘세계 최초’라는 수식을 달고 나와야 기사가 성립되는 촌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지도 모른다. (모든 자연과학 논문에 발표된 내용은 다 세계 최초이다. 세계 최초가 아니면 논문으로 발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그만 쓰자!)
19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내가 친지들에게 가장 많이 들어온 생물학 관련 질문 중 하나는 ‘GMO 식품을 먹어도 안전하냐’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안전하다’이다. 그러나 친지들은 신뢰할 수 있는 생물학자에게서 보다 알아듣기 쉬운 설명이 나오기를 원했다. 물론 음식이 인간의 배 속에 들어가면 모든 성분이 다 영양원으로 소화되기 때문에…… 어쩌고저쩌고 하고 비교적 간단히 설명할 수도 있지만, 친지들이 정말로 그 사실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이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아, 정말 그렇구나!’ 하고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생물학 지식을 논리적으로 바르게 알아가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일반인들은 내가 생물학 교수라는 얘기를 들으면 “난 생물학이 재미없었어요. 그나마 과학과목 중에 생물학이 쉬웠어요!”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물론 중고등학생들도 똑같은 말을 종종 한다. 재미는 없지만 쉬운.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두 의견은 생물학이 암기 과목이라는 곳에서 합의점에 이른다. 현재 중고등학생들과 그와 같은 교육과정을 거쳐 사회에 진출한 사람들, 더 포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생물학 전공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개 생물학에 대해 이처럼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의 시간 동안 생물학을 공부 혹은 연구하면서 생물학이 암기과목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연구 생활을 하면서는 생물학이 물리나 수학, 화학처럼 논리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전형적인 과학과목이라는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어째서 이런 괴리가 생겨버렸을까? 중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에서도 생물학을 논리적 학문으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2011년 겨울, 서울대학교 입시 면접 및 구술고사 문제를 출제하기 위해 일주일 간 모처에서 합숙한 적이 있다. 당시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 여러 권을 찬찬히 살펴볼 기회가 생겼는데, 생물학에 대한 오랜 오해의 이유를 그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교과서 속 생물학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학문이 아니라 잡다한 지식의 암기를 필요로 하는 박물학이자 논리적·수리적 사고가 필요 없는 학문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러한 심각한 왜곡 현상이 고착되고, 이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난 암기가 싫어서 생물학이 싫어요!”라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생물학에 대한 호기심을 내던져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이는 내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생물 공부가 암기만 하면 되는 지루한 과목이라는 일반화된 상식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생물학도 물리학이나 수학, 화학 같은 논리적 과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의 제목을 한때 ’21세기에 다시 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할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천재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1948년에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슈뢰딩거는 DNA가 무엇인지 유전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시기에 생물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려 시도한 책을 썼다. 당시까지 축적된 물리적·화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생명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 한 것이다. 그가 지금 시대의 생물학적 지식을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책을 쓸까를 상상해보고는 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보면 한층 더 재미있게 생물학을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물리학과 화학의 지식을 동원하여 생물을 이해한다는 관점으로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고1인 우리 아이에게 생물을 이해시킨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고민하여 얻은 성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이와 함께 산책을 하며 재미있는 생물학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해보자 생각하고 쓴 글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생물학을 접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치며, 무엇보다 세상, 우주, 인간, 나를 이해하는 즐거운 생물학 여행에 동참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2014년 11월
지은이 이일하
[차례]
1부 생명은 흐름이다
- 흐름을 유지하는 물질대사 | 43
- 생명은 흐름이다!
- 무생물에서 생물이 빚어지는 마술, 창발성 | 53
- 생명은 탄소골격의 화학조립체
- 생물학자가 들려주는 화학 결합 | 64
- 영화 <트랜스포머> 속 기계인간은 가능할까?
-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 78
- 외계 생명체를 찾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들
- 생명의 레고블록 | 86
- 생명성을 제공하는 분자와 정보 저장 분자
- 생명의 최소단위, 세포 | 98
- 왜 코끼리만 한 세포는 없을까?
- 생명체의 현찰 에너지, ATP | 110
- 우리는 에너지를 어떻게 얻을까?
2부 생명은 반복한다
- 세포들의 젊어지기 | 129
- 낡은 세포는 가고 신선한 세포가 들어서니
- 생식세포의 생산 | 137
- 회춘하는 세포들
- 유전적 다양성 | 143
- 지구 상의 오직 한 사람 내가 유일무이한 이유!
- 붉은 여왕과 성의 진화 | 148
- 여왕님은 왜 계속 뛰고 계세요?
- 멘델의 유전 법칙 | 154
- 입자성 유전의 패러다임
- 유전 물질의 발견과 이중나선 | 167
- 왓슨과 크릭의 통찰력
3부 생명은 해독기다
- 디지털 정보와 아날로그 정보 | 177
- 1차원 정보가 3차원 정보로 전환
- 유전 정보를 복사하는 전사 | 185
- 필요한 만큼만 복사해라!
- 복사체를 이용한 단백질 생산, 해독 | 191
- 세포 내 공작기계, 리보좀
- 유전자 발현 조절 | 200
- 세포마다 다른 이유
- 유전공학의 탄생 | 208
- 신이 된 인간
- GMO의 생산 | 216
- 사장 되어가는 제2의 녹색혁명 기술
4부 생명은 정보다
- DNA, 유전자, 그리고 게놈 | 227
- 이름부터 알고 보자!
- 인간 게놈 프로젝트 | 236
- 대량 정보의 생산과 처리
- 게놈 속의 정보 | 247
- 생명의 설계도에는 어떤 내용이?
- 인간 게놈 속의 암흑 물질 | 255
- ENCODE 프로젝트
- 생명의 탄생, 배발생 | 267
- 오리가미를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손
5부 생명은 진화한다
- 다윈의 진화 메커니즘, 자연선택 이론 | 285
- 이토록 단순한 이론!
- 내 손안에 일어나는 진화 | 297
- 20년에 걸친 렌스키 교수의 진화 실험
- 신종플루의 진화 | 306
- 빠르게 진화하는 독감 바이러스
- 진화의 동인 | 321
- 돌연변이는 자연의 섭리
- 유전자의 생성 | 333
- 유전자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 생명의 진화 | 344
- 35억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 인간의 진화 | 353
- 우리만 있었던 게 아니야!
에필로그 | 363
감사의 말 | 371
도판출처 | 372
참고문헌 | 373
찾아보기 | 374
프롤로그
2009년 여름 하와이 학회에 참석했다가 바닷물에 빠져 죽은 적이 있다. 스노클링을 하면서 정신없이 물고기를 쫓아가다 그만 차갑고 깊은 물웅 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정신을 잃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라 주변의 아무도 사고가 난 것을 몰랐고 익사가 될 때까지 꽤 긴 시간 방 치되었었나 보다. 저절로 물에 떠오른 시신이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이를 보고 놀란 수영객들에 의해 해변에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급히 건져 올린 시신은 눈동자가 뒤집혀 있었고, 달려온 앰뷸런스에서 긴급조치를 하며 심장박동기를 갖다대었을 때 심장은 멈춰 있었다. 죽은 것이다. 전 기충격기로 심장에 충격을 가하길 세 차례 다행히 심장은 다시 박동하기 시작했고, 급히 병원으로 실려간 나는 일주일간의 특수 저온 조치를 통 해 되살아났다. 의식이 없는 혼수상태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에야 발가락이 움직이더니 이어서 의식이 돌아왔다고 한다. 말하자면 임사체험을 한 것이다. 회복되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임사상태 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흔히 듣는 대로 찬란한 빛이 내 려쬐는 평화로운 동산에 꽃과 새들이 노래하는 평화로운 정경을 보았느 냐, 아님 다른 임사체험이라도 했느냐는 질문이다. 최근 하버드 대학의 신 경외과 의사이자 뇌신경 과학자인 이븐 알렉산더 교수가 일주일간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서 ‘자신은 천국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책을 펴내 화제가 된 적 있다. 임사체험을 하고 난 뒤 깨어나서 사후세계에 대해 과 학적인 지식을 동원해가며 열심히 자신이 본 천국에 대해 설명하고 다닌 단다. 풋! 스스로를 신경생물학자로 생각하고 있다니 놀라웠다. 나는 생 물학자로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사고가 났을 때 전기충격기로 심장 을 되살려 내기 전의 나는 생명체일까, 무생물일까? 심장이 멈췄을 때의 나와 심장이 다시 박동할 때의 나는 물리적・화학적으로 얼마나 다른 상 태일까? 생물학적으로는 또 얼마나 다른 상태일까? 이러한 의문이 지난 5년 동안 내 뇌리를 계속 뱅뱅 맴돌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굉장히 쉬운 질문이다. 사물에 대 한 인지 능력을 가지기 시작하는 서너 살 나이만 되어도 근사하게 다듬어 진 돌멩이가 무생물이고 내 주변을 귀찮게 맴도는 파리가 생물임을 쉽게 구분한다. 어떤 물체를 갖다놓고 이게 생물이냐 아니냐를 물어보면 꼬마 아이들도 쉽게 답을 할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식물을 갖다 놓고 이게 생물이냐 아니냐를 물어보면 대단히 쉽게 생물, 그것도 식물임 을 정확히 알아맞힌다. 물론 그 식물의 이름은 모른다. 이름은 모르지만 생물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명체에는 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이데아’가 있는 것이다. 난 이 책에서 생명체가 갖고 있는 ‘이데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이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하 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물에 빠져 죽은 상태로 건져 올려진 나는 생명인 가, 아닌가? 앰뷸런스의 구급대원이 전기충격기로 충격을 두 번만 주고 포기했으면, 흰 천으로 내 몸을 싼 채 병원으로 싣고 가서 냉장실에 집어 넣었으면, 나는 그야말로 죽은 것이며 무생물이 되었을 것이다. 내 연구실 냉장고에 바짝 마른 채 10년째 저장되어 있는 보리씨앗은 내 지인인 지질 학자의 생각처럼 죽은 것인가, 혹은 산 것인가? 물 밖으로 꺼낸 날도래는 꼼짝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다. 더구나 껍질이 모래알갱이로 이루어져 있으니 무생물처럼 보인다. 산호초는 또 어떤가! 이렇듯 얼핏 보면 무생물처럼 보이는 무수히 많은 생물들이 있다. 이들을 모두 아우르 는 생명에 대한 정의, 이데아가 필요하다. 생명체의 이데아를 드러내기 위 해 생명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생명의 여러 가지 특성, 생명의 작동원 리, 말하자면 작동 매뉴얼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우선, 여기 프롤로그에 서는 생명의 본질을 설명해줄 수 있는 특성들, 이데아에 대해 간단히 살 펴보기로 하자.
생명의 특성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생명이란 자체 신호를 가지고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물체를, 그러한 기능이 종료되었거나(죽음) 또는 그러한 기능이 없어 비활성체로 분류되었거나를 막론하고 그렇지 않은 것과를 구별 짓 는 특성이다”. 솔직히 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생물학자인 나도 단숨에 이해되지는 않는다. 아마 이 글을 올린 사람은 생명체의 자기 유지 기능, 즉 항상성을 생명의 핵심으로 본 것 같다. 나는 이 글을 올린 사람과 약간 다 른 관점에서 생명의 핵심을 이해하고 있다. 우선 생명의 교과서적 다섯 가지 특성을 살펴보자.
첫째, 생명체는 성장을 하고 이를 위해 물질대사를 한다. 영양분을 섭취 하고, 배설하는 행위를 통해 생물은 고도로 정교한 형태를 계속 유지하며 성장한다.
둘째, 생명체는 주변 환경의 자극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특성을 보인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도 빛에 대해서 반응하고 온도에 대해 생리적으로 천천히 반응한다.
셋째, 모든 생물은 지속되는 환경에 대해 적응하는 특성을 보인다. 추운 북극 지역에 사는 동물들이 지방질이 풍부하고 뚱뚱한 반면 뜨거운 적도 지역에 사는 동물들이 대개 날씬한 특성을 보이는 이유가 이러한 환경에 대한 적응 때문이다.
넷째, 어떤 생물도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생물은 생식을 통해 자손을 남긴다.
다섯째, 모든 생물은 천천히 진화 과정을 거친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지상의 모든 생물체는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은 최종 승리자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특성인 물질대사, 자극반응, 환경적응, 생식과 진 화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생명의 요소를 꼽으라면 난 항상 생식과 진화를 꼽는다. 이를 진화론자들이 흔히 쓰는 용어로 바꾸면 복제와 변이다. 생식이란 자신과 같은 자손을 복제하는 것이고, 진화란 복제 과정에서 일어나 는 사소한 에러, 즉 변이가 축적되면서 서서히 생물체가 바뀌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복제와 변이가 생물의 가장 핵심적 요소라는 주장 은 위키피디아의 정의에서 강조하는 항상성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 다. 생물은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에 자손을 통해서라도 지상에서 영속 하려는 특성을 가진 존재로, 수천 세대를 이어가면서 자신을 지구 상에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욕망으로 품고 있는 존재이다. 이제 기능적 측면에 서 생명의 특성들을 살펴보자.
1부·생명은 흐름이다
생물은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 황 등의 매우 단순한 화학원소들이 고도로 정교하게 조립되어 생명 활동을 갖게 된 존재(entity)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화학원소들은 137억 년 전 빅뱅에 의해 우주가 만들어지면서 생성된 그 원소들이다. 이 원소들이 때론 물질 속에 갇혀 있기도 하고 때 론 생명체 속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돌고 돌아, 윤회한 뒤 오늘 현재의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 이 화학원소들은 내 몸속에 오래 머물지도 않을 것 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화학원소의 90퍼센트 이상은 1년 이내에 다른 원 소로 치환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몸은 개울물과 같이 세월에 따라 흘 러가는 하나의 물질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생명이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생명은 탄소골격의 유기복합체
생명체에는 화학원소들 이외의 어떤 성분, 이를테면 영혼이나 생기력 과 같은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고 귀한 생명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생물은 결국 유기물 덩어리라는 데 쉽게 동의한다.*
그렇다면 물질이 생명이 된다는 말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반문의 답은 애석하게도 그렇다이다. 물질이 생명이 되는 이 경이로운 현 상에는 창발성이라는 물질세계의 흥미로운 특성이 깔려 있다. 단순한 것 에서 복잡한 것으로 조직화되어가는 과정에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 로운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 창발성인데, 이 때문에 조직화가 어떤 임계점 을 넘어서면 물질에서 생명성이 돌연히 나타나게 된다.
지구 생명체는 당연히 지구 상에 존재하는 물질들로 빚어져 있다. 이 물질들 중 탄소는 다양한 원소들과 결합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화학적 특 성이 있어 지구 생명체의 골격을 이루는 원소가 되었다. 말하자면 생명체 는 탄소골격으로 이루어진 고분자복합체인 셈이다. 탄소골격으로 이루어 진 분자들 중 생명체를 구성하는 네 가지 거대분자가 탄수화물, 지질, 단 백질, 핵산이다. 이들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75퍼센트의 물을 제외하면 나 머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네 가지 거대분자를 조직할 때는 그보다 간단한 단위분자를 레고블록을 쌓듯이 연결시킨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라는 단위분자가, 탄수화물은 당이라는 단위분자가, 핵산은 뉴클레오티드라는 단위분자가 사슬처럼 연결되어 만들어진 고분자중합체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단위분자에는 없던 새로운 특성이 거대분자에서 창발적으로 나타난다. 이들 네 가지 거대분자들이 다시 정교하게 서로 결합하여 세포 라는 생명의 단위가 만들어지고, 세포들이 다시 서로 정교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생명체가 만들어진다. 단계별로 높은 수준의 조직화가 진행될 때 마다 새로운 특성이 창발적으로 나타나서 인간과 같이 정교한 생물체가 되는 것이다.
단백질과 핵산: 기능과 정보
생명을 구성하는 네 가지 거대분자 가운데 생명체에 기능을 제공하는 분자는 단백질이고, 정보를 제공하는 분자는 핵산, 즉 우리가 흔히 DNA 라고 알고 있는 분자이다. 단백질이 기능을 제공한다는 말은 생명체가 호 흡을 한다거나 뛴다거나 광합성을 한다거나 꽃을 피운다거나 등등 어떤 기능이 나타날 때 그 기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생명 현상 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 원인은 단백질이며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 또 한 단백질이다. DNA가 정보를 제공한다는 말은 생명체의 생명 현상이 다 음 세대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게 단백질합성의 정보를 DNA에 저장 하여 전달한다는 말이다. 정리하면 생명 활동의 근원은 단백질이고 DNA 정보는 단백질합성의 정보이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라 불리는 20종의 단위체가 사슬구조로 연결되 어 있는 고분자중합체이다. 이러한 사슬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종류와 서열이 단백질에 기능을 부여한다. 어떤 아미노산이 어떤 순서로 배열되 었느냐에 따라 단백질의 3차 구조가 결정되는데, 이 구조로 말미암아 단백질의 기능이 결정된다. 즉 모양에 따라 각종 유기화합물과 결합할 수도 있고 각종 화학 작용의 촉매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단백질의 3차 구 조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단백질을 끓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단백질을 끓는 물에서 끓이면 아미노산 서열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기능이 소실된다. 이는 열에 의해 단백질의 3차 구조가 변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핵산의 정보 저장 기능은 그 단위체인 뉴클레오티드, 혹은 염기(A, T, G, C 네 가지만 있다)의 서열에 있다. DNA의 정보 기능은 화학 적 변성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끓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3차 구 조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백질 정보는 3차 구조가 중요한 아날로그 정보이고 DNA 정보는 서열이 중요한 디지털 정보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맞서는 생명
우리 몸은 얼핏 보면 우주의 섭리인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무질 서도) 증가 법칙에 어긋나는 존재인 듯하다. 세월이 지날수록 무질서해지 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질서가 잡혀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깊이 성 찰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생명을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살아가는 존재라 정의했다. 생명체는 모든 환경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 이지만 실제로는 닫힌 계가 아니고 열린 계이고, 생물체 내에 축적되는 무 질서도를 감소시키기 위해 영양분을 끊임없이 섭취함으로써 자연의 법칙 을 회피한다. 이를테면 우리 몸은 엔트로피 법칙으로 보면 끊임없이 굴러 가는 자전거와 같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굴러가야 하 듯이 생명체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음의 엔트로피를 흡수하여 계속해서 체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물질대사는 자전거를 계속 굴러가게 하는 동력인 동시에 흐름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물은 끊임없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는 모래성이다. 생 명체를 구성하는 원소와 분자들은 계속해서 씻겨나간다. 우리 몸을 구성 하는 원자들 대부분이 1년 안에 새로운 원자로 교체된다. 즉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낡고 무질서해진 분자들이 씻겨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생물 체의 파도는 모래알을 씻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래알을 가 져와서 모래성의 형태를 유지시켜주기도 한다. 모래성의 형태가 유지되 는 메커니즘은 직소퍼즐 맞추기와 같다. 낡은 조각이 씻겨나간 자리에 그 와 같은 형태를 가진 새로운 조각이 주변 퍼즐조각들의 형태 속에 상보적 으로 맞춰져서 들어가게 된다. 생물체 내에는 이러한 분자 간 상호 작용 이 수없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1년 전 내 모습이 대부분의 원소가 다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 모습과 같게 유지해주는 메커니즘이 다. 말하자면 생명체는 동적 평형 상태에 있는 모래성이며, 물질대사는 형 태를 잃지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해주는 힘이다.
생명의 에너지 대사
자동차가 가솔린이라는 탄화수소 연료로 작동하듯이 생명을 구성하는 세포는 ATP라는 유기분자를 연료로 사용해 작동한다. ATP는 가솔린보 다 분자량이 5배쯤 무겁지만 쉽게 쓰고 쉽게 재생하는 화학적 특성을 가 지고 있다. 생명의 에너지 연료를 생산하는 장소는 미토콘드리아와 엽록 체이다. 세포는 미토콘드리아라고 하는 배터리를 가지고 있어 이곳에서 ATP가 계속 생산된다. 식물의 경우에는 미토콘드리아뿐만 아니라 엽록 체라는 또 다른 배터리를 가지는데, 지구 상의 생물체는 모두 엽록체라는 배터리에서 충전한 태양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라는 배터리가 ATP를 생산하는 방식은 에너지 준위가 높은 전자를 전자전달계라는 통로 속에 콸콸 흘려 얻게 되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자가 전자전달계 통로를 흘러가는 힘을 이용해 발전기 모터를 돌리면 ADP가 ATP로 전환된다. 이때 전자는, 미토콘드리아에서는 포도당 등의 음식물에서 떼어낸 전자이고, 엽록체에서는 빛 에너지를 받아 들뜬 엽록소에서 떨어져나온 전자이다. 이렇게 생성된 ATP는 생명 활동에 필요한 거의 대부분의 반응, 운동, 생리적 작용에 연료로 사용된다.